@yejinmoon_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여행을 그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꿈꿔 왔었는데. 청주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을 때부터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마칠 때까지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새로운 나라를 간다는 것에 대한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 는 곳,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땅, 낯선 도시,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음식도, 그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모든 것이 낯선 곳. 호치민에서 경유를 하고 총 17시간의 긴 비행을 해야 하는데, 긴장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거의 뜬눈으로 틀어놔도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니터를 뒤로한 채 헤드폰을 끼고 새벽녘이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 빛이 더욱 선명해 지고 있었다. 파리로 가는길. 나는 그 길이 꼭 죽으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오죽했으면 이 비행기가 파리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영원히 하늘에 떠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까지 들 정도였으니. 그러나 내 바램과 반대로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당연히 최종 목적지인 공항으로 향했고 별 차질 없이 파리에 도착했다. 수화물도 잘 찾았으며, 중심부로 가는 지하철 표도 발권했다. 공항을 떠나 지하철역으로 걸어갈 때부터, 개찰구 앞에 서 있는 경비원들과 무표정으로 제 갈길 가는 사람들을 보니 그제야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면서 긴장이 되었다.지하철을 타면 근사한 파리의 풍경이 창문 밖으로 펼쳐질 줄 알았는데 내가 기대한 그런 풍경은 어디에도 없고 어두운 지하 풍경만 펼쳐져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데이터도 아껴써야 했기 때문에 핸드폰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알 수 없는 안내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몸만한 배낭을 바짝 끌어 안았다. 1 DAYFRANCEPARIS 무거운 짐을 다시 여맨뒤 고요하고 냉랭한 분위기 속 많은 인파를 뚫으며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알려준 역에서 하차하자마자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처럼 출구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건 최첨단 기술이 아닌 몇 백개의 계단이었다. 아직 파리의 공기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지친 기분이다. 설레는 마음으로도 어깨가 짓눌리는 무거운 짐의 고통은 덜어주지 못했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는 무게를 감당하며 고지를 향해 묵묵히 걸어 올라가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내 옆에서 "도와줄까요?'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하다하다 환청까지 들리는가 싶어 그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약간의 노란빛이 도는 갈색 머리에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흰 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었으며, 턱수염이 인상적이던 남자가 나를 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친절은 처음이라 하마터면 짐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까지 이름도 모르는 이 남자에게 내어줄뻔 했지만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우리 둘이서 힘을 합쳐 들었던 캐리어를 혼자서 한 손으로 번쩍 들더니 먼저 올라가라며 손짓까지 해주는 젠틀함마저 겸비해있었다. 나는 짐을 그에게 전달해 준 그 순간부터 계단을 한 칸씩 올라 갈때마다 그의 귀에서 피가 날정도로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우리 모두를 고생하게 한 캐리어를 내려놓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격렬히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주위를 돌아보자마자 덜컥 눈물이 쏟아질뻔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뒤쪽에는 성당이, 옆면에는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는 식당들이 있었는데 가게 테라스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주변에 사는 주민 들처럼 편안해 보이고 어색함 없이 이 거리에 잘 녹아 들어 있었다. 어떤이는 담배를피우며 신문을 보고, 또 어떤 이는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겐 지독히 일상적인 저 모습들이 먼 나라에서 온 내게는 책에서만 보던 내 로망이요, 영화에서만 보며 지독하게 꿈꿔왔던 나의 꿈이었다. 분명 5분 전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바깥 풍경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국적인 건물들과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눈에서 빛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 시작일뿐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북 받쳐 올라와도 되는걸까. 앞으로 더 굉장한 풍경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것들을 보면 엉엉 울게되는건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하며 곧 흘러 내릴것 같이 촉촉한 눈밑을 행여 누가 볼까 재빠르게 닦아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낭을 질끈 여미고, 힘을 합쳐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아직 갈길이 멀다. 숙소는 11구에, 역에서 10분 정도 걸렸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숙소도 역시 낡은 곳이었다. 집 전체로 빌려 한 건물을 통째로 쓸 수 있었지만 1층은 나선형 계단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면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었다.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주방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면 침실이 있는데, 여자 셋이서 누워도 될만한 큼지막한 침대와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 그 뒤에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큰 거울과 호스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납장이 전부였다. 방구석 한편에 애물단지인 짐을 내려놓고 긴 비행과 이곳까지 오느라 거의 모든 체력이 방전되어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분명 몸은 힘든데, 마음만은 자꾸 설레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맑게 개어진 하늘만 보고 있어도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내 마음도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불안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눈이 녹듯 녹아버리고 바람이 분 것처럼 말끔히 날아가 버린 듯하다.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도 이국적이고,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모두 알아들을 수 없을 때 내가 드디어 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장차 20시간만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나 드디어 파리에 왔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한참을 걷다보니 오르세 미술관이 있는 쪽까지 와버렸다. 새벽에 공항을 벗어나 아침부터 체력을 소비해 잔뜩 허기가 진 우리는 빵 냄새가 가득히 나던 빵집에 가서 연어 샌드위치를 사고, 미술관 근처에 있던 작은 노점상에서 물과 아이스티를 각각 사서 마른 목을 적시며 센느강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물 비린내, 센느강 위에 유람선을 탄 관광객들, 아직은 낯선 건축물들. 우리 옆자리에 앉은 학생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도, 그 옆 사람 모두 받치고 앉을 종이나 의자 없이 맨바닥에 앉아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그들에게는 빵과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그 곳이 어느 장소가 되었든간에 점심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는구나 싶었다. 이 문장이 얼마나 멋있는가 싶다. 내 글이 멋있다는게 아니라, 그들의 자유로움이 멋있다는 얘기다. 제작년 11월 졸업전시회가 끝나고 담당 교수님과 상담을 하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넌 졸업하면 뭐할거야? 취업할거야, 아니면 프리랜서?""그 전에 여행가려구요!""여행? 어디?""유럽이요!" 이때는 파리에 에펠탑만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에 대해 아주 무시했던 시절이었다. 백지장 같은 내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뱉어낸 말이었다. 솔직히 갈 거예요,라고 말했지 내 말에 책임을 질 수 없었다. 아무런 지식도 없는 내게 교수님께서는 "그럼 오르세나 루브르도 가겠네?"라고 말씀하시자 "아뇨. 괜찮을 것 같아요. 저는 그냥 파리 거리만 걸어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미쳤냐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거기까지 갔는데 그냥 걷기만 한다고? 그럼 너무 아깝지 않니? 방금 말한 미술관 가보면 아마 네가 아주 좋아할 거란다." 내가 내년에 간다는 보장도 없고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었기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꼭 가볼게요!" 미술관에 들어가자마자 2열로 서있는 조각상들을 피사체 삼아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나도 그들 옆에 앉아 드로잉북을 펼치고 내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신기하듯 옆에 앉아 슬쩍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성의 그 중요 부위가 있었는데 내가 너무 시원찮게 그려서 차마 공개할 수는 없다. 고흐의 그림 앞에 섰을 때,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몸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점점 위로 차오르더니 이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울컥 차오른 감정은 쉽게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무려 6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고흐를 좋아하고 그의 책을 사드리고 그가 관련된 영화를 감상하고 그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언젠간 이런 날을 꿈꿔왔던 적이 있다. 사진이나 종이가 아닌 붓의 터치감과 질감이 한눈에 느껴지는, 살아 숨 쉬고 있는 진짜 그림을 보고 싶었다. 정말 오랫동안 그림 앞에 서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 모두 고흐의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림을 계속 보고 있자니 지겨워지기는커녕 그가 살아왔던 시대로 들어간듯한 기분이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예고도 없이 나온 콧물을 조심히 들이 삼켰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 기분을 과연 어떤 언어로도 구사를 할 수 있을까. 3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와 카페가 있다. 모든 전시를 둘러 본 나는 오르세하면 떠오르는 시계 모형의 창문을 지나치고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보인다. 예술가들의 거리, 몽마르트 언덕. 내일은 저 곳에 가야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했다. 여행이 좋은 점은 예부터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원하는대로 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르세에 오지 않았으면 정말 후회했을 거야. 아니, 후회라는 것도 모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참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평생 무지한 채로 살았을지도 모르지. 5시간 내내 있었던 미술관에 나와 근처에 있던 튈르리 공원에 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일렬로 우거진 나무들을 지나면 공원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다. 그 분수대를 중심으로 둘러 앉은 사람들은 가져온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핸드폰을 만지는 사람은 굳이 찾아야만 한 두명 있을까 말까였다. 뭔가를 잔뜩 챙겨온 두툼한 에코백에서 드로잉북과 오르세에서 구매한 엽서와 케이스를 꺼낸 뒤, 원래 끼고 있던 지저분한 케이스를 벗겨내고 새로운 케이스로 갈아 끼었다. 그것만으로도 풍성처럼 부풀어오른 마음으로 한국에서부터 다운 받았던 미드나잇 인 파리 ost를 들으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어 이야기 보따리가 터질만큼 포화상태였던지라 내 손은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느라 바빴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아무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달팽이 음식과 양송이 수프, 스테이크를 먹은 뒤 에펠탑을 향해 지하철을 탔다. 트로카데로 역 1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근방에 있다면서 주변에 아무것도 없길래 잘못 나왔나 싶었지만 일단 앞으로 쭉 걸어갔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지도가 가라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꽉 막혀있던 건물들 뒤에 숨겨져있던 에펠탑을 마주했을 때. 너무나도 순식간에 압도당한 그 기분을 말이다. 마치 실존하지 않은 거대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웅장한 자태에 몇 분간 카메라를 들지도 못했다. 하루동안 사람을 이렇게나 많이도 심장을 터질때까지 설레게 하다니. 이러다간 새가슴같은 내 마음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싶었다. 오후 10시가 되면 에펠탑이 불이 켜진다하여 계단에 앉아 있다가 가슴이 진정되어 한 다섯 장 정도 사진을 찍은 뒤 카메라를 내려놓고 시계를 봤다. 얼마 있으면 켜진다. 그것을 직감한 사람들이 하나 둘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10시가 되자 에펠탑에서 불이 들어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수 많은 별들이 한 곳에 모여 빛나는 듯이 보였다. 사진을 찍던 사람들도 갑자기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빛나는 에펠탑을 바라 보았다. 불이 하나 켜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한듯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한다. 밤 10시가 되면 매일 켜지는 불일 뿐인데도,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늘 새롭다는 듯이 빛나는 에펠탑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듯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주기 식으로, 남을 위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나한테도 던지고 싶다. 처음에 이렇게 사진 찍기 시작한 이유가 내 추억이 조금 더 이뻤으면 하는 바람에 시작하게 되었지만 어느 순간 나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변질돼가는 것 같다. 인스타에 사진을 업로드할 때마다 어떤 사진이 사람들에게 더 이쁘게 보일까 고민하고 있으니. 그저 내가 좋아 보이는 것을 올리면 될 것을 이 문제 해결하기가 왜 이리도 힘든지. 어쩌면 내가 진정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나 자신부터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사람처럼.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이제 조금은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 2017. 6.5 copyright ⓒ yejinmo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