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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PANION 22 DAY (Grindelwald-First)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진 찍는 것과 잠을 자는 것, 그리고 노트를 꺼내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라 한참 동안이나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나이 상관없이 모두 기본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편을 나눠 물장구를 치는 학생들, 낮은 절벽에서 차례대로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 그 뒤에 서 물속으로 점프하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언제 뛰어내릴까 눈치를 보는 사람들. 물에 자신을 맡긴 채 하늘을 보며 유유히 바다 위를 떠다니는 사람들.바다에 해피 바이러스가 퍼져서 물에 들어간 사람들 모두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건지, 아니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있던 바다에 생기를 넣어준 것인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니스의 바다 모든 곳에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THE COMPANION 7 DAY (Nice) 이곳의 여름은 밤 10시가 돼야 해가 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빛나는 에펠탑을 보고 싶어 샹젤리제 거리를 활보하다 9시쯤에 지하철을 탔다. 분명 트로카데로 역 1번 출구에 나오자마자 볼 수 있다는 글을 봤는데 글과 다르게 보이지 않아 잘못 왔구나 싶어 역에서 나온 방향으로 막연히 걷기만 하던 때였다. 아마 나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꽉 막힌 건물들 끝에 도달하자 그 뒤에 숨어있던 에펠탑을 마주했을 때 순식간에 압도당한 그 기분을 말이다. 마치 실존하지 않은 거대한 환상 속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에펠탑이 뿜어내는 웅장한 자태에 몇 분간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에펠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사람들은 에펠탑 주변으로 오순도순 모여 가벼운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에펠탑을 배경 삼아 잔디 위에 앉고 가방 안에서 노트를 꺼냈다. 아직 첫날인데 벌써부터 일기장에 쓰고 싶은 내용들이 차고 넘쳐서 어떤 것부터 먼저 써야 할지 막막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늘 지나치는 풍경과 똑같은 일상이겠지만 1시간이면 도시 전체를 누릴 수 있는 충청북도 청주가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던 나에게 펼쳐진 지구 반대편 세상은 현실이 아닌 꿈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꿈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오늘 이곳에서 느낀 감정들과 생각들을 붙잡아 두고 싶어 펜을 들었다. 10페이지의 긴 분량의 글을 쓰다가 손이 저려와 급하게 마침표를 찍으려던 찰나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니 에펠탑에 불이 켜져 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간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처럼 빛나는 에펠탑을 오랜 시간 동안 두 눈에 담았다. THE COMPANION 1 DAY (Eiffel Tower) 육안에 보일 정도로 해가 순식간에 산 너머로 넘어가자마자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 듯 붉게 물든 풍경을 배경 삼아 중앙에 앉아 있던 한 커플 중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자리에 일어나 미리 준비한듯한 반지를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친구에게 건네며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을 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처럼 입을 틀어막으며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수줍게 건넨 남자의 반지를 받아줬다. 승낙한 기쁨을 숨기지 못한 그는 그녀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했고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를 해줬다. 옆자리, 뒷자리, 앞자리 할 것 없이 모두 그 둘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한다. 이곳에서는 영화에서만 봤을 법한 일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일어난다. 어쩐지 내가 저 커플들이 주연인 영화에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름도 알지 못하는 처음 본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행복을 바라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좋았다. THE COMPANION 12 DAY (Piazzale Michelangelo) 아침부터 조짐이 보였던 하늘에서 오후가 되니 한바탕 쏟아졌다. 할 수 없이 당장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 그러다 간신히 어느 가게의 천막 아래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빗소리만 들려왔다.나는 어쩌자고 이곳에 왔을까. 돌이켜보면 내 여행의 반은 고생뿐이었던 것 같다. 절벽에서 핸드폰을 떨어트리고, 사람에게 데이고, 더위를 잔뜩 먹고, 천둥번개 치는 날 무거운 배낭과 캐리어를 끌며 빗속을 달리고, 몇 조각의 빵으로 하루를 버티고. 이쯤되면 고생을 하기 위해 떠나온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비가 그칠 틈이 보이지 않아 근처에 있는 아무 카페나 들어가 몸을 피했다. 카페 안에는 달콤한 커피 냄새와 스콘 냄새가 났고 좁은 빨래를 널어놓은 듯 굉장히 꿉꿉했다. 들어오자마자 주문한 라떼와 까눌레는 맛이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주변 풍경들이 모든 것을 커버해 주는 느낌이었으니까.창가 자리에 착석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한참 멍을 때리고 있다가 시선이 누군가와 부딪히는 것 같아 고개를 살짝 돌렸더니, 내 옆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갈색 수염이 굉장히 인상적인 한 남자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문득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이 긴 여행 중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THE COMPANION 31 DAY (Prague) 3일간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슬슬 몸이 지쳐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내내 연신 하품을 해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은 설레기만한 것이 여행이다. 하지만 이 날은 정말 힘든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갈 준비를 마치고 지하철을 탄 디 6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하필 일요일은 그 노선이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곳으로 다이렉트로 가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인데.그러나 여기서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우리에겐 아직 최후의 방법이 남아있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고단할지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야만 했다.(중략)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은 호수, 언니의 머리를 묶어주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동생,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호수 주변으로 산책을 하는 부부, 책을 읽는 학생들, 나무 밑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남자친구, 원을 그리며 빙 둘러앉아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듯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조용하게 속닥 거리는 사람들,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머물며 미동도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안경을 쓴 남자.강에는 생명력이 깃들어져 있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고요하지만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은 호수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가방에 챙겨온 드로잉북과 4b연필을 꺼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화려한 궁전도 좋았지만 호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점점 뉘엿뉘엿 지고 있음에도 호수 근처로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궁전을 다 돌아본 사람들이 이대로 가기 아쉬워 들린 마지막 종착지일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곳에 보물을 숨겨둔 것도 아닌데 그때 왜 그렇게 목숨을 걸어서라도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는 이 호수가 우리를 부르고 있던 건 아닐까. THE COMPANION 3 DAY (Versailles)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에 도착한 첫째 날, 처음부터 꼬일 때로 꼬인 날이었다. 로마 역에서 사기를 당해 기차를 놓치고 서둘러 달려간 공항에는 예약에 문제가 생겨 하필 비행기 탑승 10분 전에, 목적지까지 걸어서 20분이나 소요되는 거리를 15kg의 배낭을 메고 5분 안으로 뛰어서 도착해야만 했으며, 스위스에 도착해 숨 좀 돌릴 겸 몽퇴르에서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숙소로 향하는 기차를 잘 못 타기까지 했다. 안 좋은 일들은 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오늘이 내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환승하기 위해 스피치 역에서 내려 기차를 기다리다고 있었는데, 바로 역 앞에 있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 그림처럼 선명하게 뜬 무지개 하나가 잔뜩 지친 나에게 큰 위로로 다가왔다. 이 무지개를 만나기 위해 이제까지 그런 역경을 이겨낸 걸까. 행복이란 참 이렇게 단순하다. 내게는 가질 수도 없고, 굶주린 배를 채우지도 못하는 그 무지개가 고단한 하루 끝에 받은 귀중한 선물같았다. THE COMPANION 21 DAY (Switzerland) photo by @yejinmoon_opyright ⓒ othcomma all rights reserved